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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순간

gleamyday 2020. 5. 14. 12:57

 

"알바야, 알바. 뭐 그렇게까지 하니?"

 

보통 친구들은 돈 벌기 위해, 거기에 '재미'를 위해 테마파크에서 알바한다. 나 또한 그렇다. 다른 점이라곤 남들보다 귀신에 더 관심이 많고 좋아한다는 것. 

남들이 얼굴에 피를 그릴 때 나는 피가 나오는 상처의 근원을 집중해서 그린다. 남들이 "으~" "악!" 하며 놀라게 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진정 놀라게 할 수 있는 '대사'를 생각한다. 나는 그렇다.

오늘도 나는 한 사람을 더 놀래켜주고 싶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놀랄 때, 거기에서 오는 희열이 있다.

 

내 자리는 귀신의 집 초입. 암막 커튼을 넘어 '귀신의 집으로의 초대'라는 푯말을 바라보며 다리를 하나 건너면 나오는 창살 없는 감옥. 그곳이 내 스폿이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놀라 자빠진다. "악!" "엄마야!" 어떤 사람은 주저앉기도 하고, 너무 놀란 나머지 화가 난 어떤 사람은 나를 진심으로 때리려 하기도 했다. 그 반응들이 나는 재밌다. 항상 놀라는 사람들. 그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그 반응에 보답하기 위해 나도 매일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한다. 

 

오늘의 컨셉은 '사랑 못해본 처녀 귀신'. 정략결혼의 첫날밤, 임진왜란의 발발로 첫날밤을 즐기지도 못한 체 억울하게 총탄에 맞아 죽은 처녀. 나쁜 왜놈들. 그 뒤로 500년 동안 지상을 떠나지 못하는 그녀는, 매일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들도 사랑을 못하게 한다. 

 

한 무리가 들어온다.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으로는 남자 두 명. '흠, 남자는 놀라게 하기 쉽지 않은데. 그것도 두 명이라니.'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대사를 되뇐다. 그리고 발사!

 

"어디 갔다가 이제... 악!"

 

"아.. 아버지!"

 

한 남자는 심장을 움켜 잡고 쓰러졌고, 한 남자는 그 사람을 부축한다. 그리고 나는 그 부축하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린다. 빡빡머리의 그 남자는 군인인 듯하다. 아님 곧 군대 가나? 쓰러지려는 아버지를 붙잡은 그의 팔뚝. 힘줄이 불끈 솟아오른 그 팔뚝은 당장이라도 나의 입을 틀어막을 듯하다. 500년 전, 그 첫날밤을 망쳐버린 왜놈들. 그들로 인해 일생을 망쳐버린 나. 500년 만의 한을 풀 수 있게 된 건가. 잠깐, 내가 왜 이런 망상을 하지? 나는 귀신인 거야, 사람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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