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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의 감정'이 싫다 / 권석천

gleamyday 2020. 7. 13. 12:37

 

 

2019.06.04

 

정치는 허업(;실속이 없이 겉으로만 꾸며 놓은 사업)인가. '혀업'인가. 요즘 정치인들이 감정적으로 내뱉는 '불상의 발사체'들을 보면서 의문이 생겼다. 혀로 쌓은 업보를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가.

 

'차가운 강물 속에 빠졌을 때 이른바 골든타임은 기껏해야 3분이다.' 민경욱 자유한국당 대변인의 페이스북 글이다. 헝가리 유람선 사고 실종자와 그 가족을 어떻게 여기면 이런 말이 나올까. 감정의 온도가 다뉴브 강물보다 차갑다.

 

"아주 걸레질을 하는구먼. 걸레질을 해."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한선교 한국당 사무총장 발언이 나왔다.

 

지난달 29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첫 공판을 법정에서 지켜보며 느꼈던 건 또 다른 질감의 감정이었다.

 

"이 민주정을 채택하고 시행하는 나라에서 법원에 대해 이토록 잔인한 수사를 한 사례가 대한민국밖에는 어디 더 있는지..." 전직 대법원장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혔다. 분노, 울분, 냉소, 우려, 참담함... 그의 말을 들으며 밀려온 감정들의 리스트다. 그런데 한 가지 빠진 감정이 있었다. 부끄러움이다. 그가 42년간 법관으로 살아왔다면 이 한마디는 했어야 한다.

 

"제가 검찰 수사의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재판하고, 유죄 판결해왔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그때 그 피고인들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부끄러움은 조금 특별한 감정이다. 사회적이고 공적인 감정이다. 객관적인 상황 인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양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대법원장님 심기'를 살피는 게 왜 그토록 판사들에게 중요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감정과 공적 활동의 경계는 모호하다. 자기 마음속의 감정을 입 밖에 내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부장판사 출신 도진기 변호사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판사들이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재판할 때 자신의 질문에 변호사나 피고인이 '그게 아니다'고 말하면 판사 기분이 상해버립니다. 그렇게 생긴 감정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고요."

 

판사뿐일까. 어떤 검사는 참고인으로 부른 사람이 소환에 응하지 않자 얼마 전 그를 해당 재판의 증인 명단에 집어넣었다. 그의 증언이 꼭 필요했을까. 당사자는 "검사분께서 기분이 안 좋았던 모양"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기자들도 다르지 않다. 취재하다가 짜증이 나거나 비위에 거슬리면 비판의 볼륨을 높인다. 전문용어로 '조진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는 겁니까."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공정해야 할 직업들이 자기감정에 따라 칼춤을 춘다. 창피하게도, 나 역시 내 감정을 엄격하게 대하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편향과 감정적 특성이 있다. 그런 것들이 공적 영역을 오염시키지 않으려면 차단벽이 있어야 한다. '나는 공적인 일을 하니까, 내가 느끼는 건 모두 공적인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업무를 하면서 그날 기분이나 자기감정에 거리를 두지 않을 때 '갑질'이 튀어나온다.

 

'통이 작은 사람들이란 끊임없이 지저분한 짓으로 좋건 나쁘건 자기감정에 만족하는 법이다.' (발자크, <고리오 영감>) 당신은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스스로 물어야 한다. '지저분한 짓'인가. '자기감정을 만족시키려는 것'은 아닌가. 공적인 감정 표현에는 '개인감정이 아니다'는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쥐꼬리만 한 권력을 쥐거나 마이크만 잡으면 개인감정이나 취향, 기호를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이 있다. 꼭 민경욱씨나 한선교씨 경우를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청와대든, 국회든, 정당이든 공론의 장에 자기감정의 부유물들이 떠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더 이상 피곤해지기 싫다. 이해하기도 힘들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들의 감정에 내 마음이 부대끼는 게 넌더리 나게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