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날
시가 무슨 소용인가/황현산 본문
대중가요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종종 그 가사가 아름다워 감명을 받을 때가 많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이건 시다"라고 말한다.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시의 전문가들도 그렇게 찬탄한다. 어쩌면 그것은 시 이상일지 모른다. 시가 이만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 적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어떤 시인이 이런 가사를 써서 용감하게 시라고 들고 나선다면 사정을 사뭇 달라질 것이다. 어제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시라고 불렀던 전문가들이 오늘은 그 용감한 시인을 곁눈으로도 쳐다보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노래의 가사와 시에 적용하는 잣대가 다른 셈인데, 비단 문학에서만이 아니라 미술이나 음악 같은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사정은 이와 비슷할 것이다.
시를 쓰거나 가르치거나 비평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눈에는 어김없이 시인 것과 비슷하나 아닌 것의 차이는 극히 미묘하다. 사실 이 미묘한 차이는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의 변덕스런 감정이나 개인적 기호에 따른 주관적 견해에 불과할 수 있다. 게다가 역사적, 문화적 정황이 달라지고 문화 향유와 전수의 제도가 바뀌면 시와 시 아닌 것을 가름하는 전문가적 기준 역시 홍수를 겪고 난 여울의 물줄기처럼 어제 일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할 수도 있다. 아주 불행한 경우에는 그 기준이라는 것이 문단을 지배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농간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극렬한 민중주의 시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시인이라면 시가 되는 말과 시 아닌 말 사이에 날카로운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시의 말이 지니는 독창성과 그 감정의 깊이를 짚어 시인은 시인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김수영도 그렇게 말했다. 이 차이에 대한 인정이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긍지를 만들고 시단 전체의 내부적 결속으로 이어진다. 옳건 그르건 문화적 이상이 거기에 있고 고급 문화에 대한 개념도 거기서 나온다.
그런데 이 긍지가 그 시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신에게 특별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 곧 시를 쓸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믿었기에 불행해진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도 많다. 전답을 팔아 일곱 권의 자비 시집을 내고 파산한 사람도 있다. 잘 나가던 직장을 버리고 시쓰기에 전념하기로 마음 먹은 결과로 가족을 잃고 떠돌이가 된 사람도 있다. 시만 쓰지 않았으면 똑똑했을 사람이 어쭙잖은 시를 써서 바보 소리를 듣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극심한 열등감에 시달리면서도 신들린 듯 날밤을 세워 말을 고르는 사람들이 그 수만큼 많다. 그것이 시의 전통이기라도 한 것처럼 시마(詩魔; 시를 지을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마력)라는 말이 예부터 존재해 왔다.
게다가 이 재능과 긍지가 사회적으로는 또 무슨 소용인가. 시가 인간의 불행을 끌어안고 감동을 준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거라면 대중가요 한 곡이나 연속극의 대사 하나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아름다움에 관해 말한다면, 여기저기 광고방송에만 해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빛나는 장면이 널려 있지 않은가. 시가 그 위에 더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이만 뜸을 들이고 결론을 말한다면 이렇다. 온갖 종류의 대중물과 상업물에는 '시'가 충분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를 소비할 뿐 생산하지는 않는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저 대중 소비적 '시'의 소구력(광고가 시청자나 상품 수요자의 사고나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힘)과 성공에 비한다면, 새로운 감수성과 이미지의 생산이 목표인 본격적인 시의 수요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하다. 그러나 시가 생산한 것은 어떤 방법과 경로를 거쳐서든 대중물들 속에 흡수되고 전파된다. 시는 낡았고 댄스 뮤직은 새롭다고 믿는가. 사실을 말한다면 시에서는 한참 낡은 것이 댄스 뮤직의 첨단을 이룬다.
프랑스 상징주의를 알고 중국의 3세대 영화나 5세대 영화를 아는 사람들은 그 둘이 기이하게 닮았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것이다. 시의 열병을 심하게 앓았던 사람이 지금 동숭 아트홀에서 상연하는 '헤드윅'을 본다면 거기에 랭보와 아폴리네르와 휘트먼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가를 또한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은 시의 소용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 거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200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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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는 시로 대표되는 고급문화의 시녀일 뿐이다'식의 주장이 아니라
시의 소용에 대해서 쓴 이 글은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이 시간에도 책상 앞에 앉아 시의 말을 고르기 위해 언어의 세계를 헤집는 그들을 나는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계속해서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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